Monday 25 July 2022

주일설교: 간절한 기도 - 주기도문 (누가복음 11:1-13)



말씀 : 누가복음 11:1-13
주제 : 간절한 기도 주기도문


차례

1. 이상한 일 한 가지
2.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싶은 제자들 이야기
3. 위험하고 아픈 상황에서 시작한 주기도문 소개
4. 하늘에 계신 아버지
8. 기도가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1. 이상한 일 한 가지]]


교회 뒷마당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비파 나무에 비파 열매가 열렸습니다. 비파 나무에 비파 열매가 열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지금은 비파 열매가 열리면 안되는 계절입니다. 그러니, 이상한 일입니다.

“과일 나무에 열매가 열리면 좋은 것이 아니냐?” 하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뒷마당에 나가서 비파 열매를 보시기 바랍니다. 열매들의 크기가 작고 약합니다. 너무 일찍 열매가 열렸기 때문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나무들도 힘을 잃고 아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비파 나무처럼 힘들고, 아프고, 지칠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나요? 그럴 때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주기도문은 그런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드리는 기도입니다.

[[2.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싶은 제자들 이야기]]


예수님께서도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40일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새벽에 기도하셨고, 낮에도 기도하셨고, 밤에도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에도 빠지고 불에도 넘어지는 어린 아이를 고치셨던 기적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어떻게 고치셨냐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기도로 고쳤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제자들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기도이지요.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보다 짧은 형태로 기록되었습니다. 덕분에, 좀더 쉽고, 기억하기 좋습니다.

[[3. 위험하고 아픈 상황에서 시작한 주기도문 소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다른 점이 또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길이가 길고 짧은 것보다는, 돈의 액수를 말할 때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칠 때에, 마태복음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일만 달란트는 백만장자 또는 억만장자보다도 더 큰 “조” 단위의 어마어마한 빚을 이야기합니다.(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용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는 그렇게 큰 돈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렙돈 두 개 이야기가 나옵니다. 렙돈 두 개는 골드코인 한 개 정도의 가치인데, 그것이 가난한 과부의 하루 생활비 전부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가난한 과부보다 더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그 배경 자체가 가난하고 아픈 환경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이런 방법으로,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가난한 과부, 거지 나사로, 차별당하는 사마리아 사람, 마르다와 마리아 같은 여자들, 어린이와 청년들의 이야기가 아주 특별하게 소개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전대도 자루도 두 켤레 신발도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머리둘 곳도 없이 다녔다고 합니다.

특히,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이 위험한 시대였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덧붙여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가난, 차별, 십자가 고난과 같은 위험한 상황 속에서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코비드19, 온난화, 전쟁과 같은 아픔 속에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가난한 과부와 거지 나사로처럼 굶어 죽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오고,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차별받고 버려져도 누구하나 편들어 주는 사람이 없고,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도 여성과 아이들이라고 해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4.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요”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주기도문은 그렇게 아픈 시대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아파서 괴로와하는 제자들의 신음소리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그런 절박한 상황 때문에 울음이 나오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한밤중에 약속없이 찾아간 친구집의 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심정으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름이 거룩하다”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한다는 절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 하고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하는 말씀과 짝을 이루어 기록하였습니다. 이집트는 억압과 아픔과 고난과 신음과 절망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말씀은 그런 방법으로 “이끌어 내셨다”라는 구체적인 사건과 또는 행동과 짝을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한다고 명령할 때에,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명령과 함께 기록해 놓았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 하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구체적인 예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읽어 봅니다.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줍지 않는 것이 거룩한 행동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배려해서 남겨 두는 것이 거룩한 모습 그 자체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쓰고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행동입니다. 레위기의 말씀을 계속 읽어 봅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 사기하지 못한다. 서로 이웃을 속이지 못한다.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여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너는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네가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다.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이런 말씀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신 말씀과 짝을 이루어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살아가는 거룩한 행동의 예입니다.

[[6.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


동시에 이것이, 우리 가운데,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간구하는 기도의 구체적인 실례입니다. 이제, 온난화 기후 위기 시대에 드리는 “주기도문”의 구체적인 실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말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태양열과 풍력같은 자연 발전을 이용하고, 한 번 산 물건은 달아 없어질 때까지 고쳐서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사는 우리의 거룩한 삶입니다. 지구를 살리는 일이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거룩한 일입니다.

[[7. 우리에게 일어나는 기적]]


오늘 누가복음에서 다시 듣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코비드19, 온난화, 전쟁의 위험과 아픔 속에서 “시험에 들지 않는 기적”이 우리 삶 속에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8. 기도가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40일 광야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 가운데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회복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 삶 속에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회복되고, 특히, 우리가 날마다 드리는 “주기도문”의 기도가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 뒷마당의 비파 나무도 행복하고, 여러분도 행복하고, 우리 이웃도 행복하고, 지구도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교회 #주일설교

Wednesday 20 July 2022

[마가 1:15] 때가 왔다 - 그러나, 기대와 다른 이유

폭우 끝에 찾아 온 눈부신 아침 햇살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5)

Intervention or Collaboration? It is hard, however, to realize how absurd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s presence must have sounded to its first hearers. ... You have been waiting for God, he said, while God has been waiting for you. No wonder nothing is happening. You want God's intervention, he said, while God wants your collaboration. [출처] Crossan, John Dominic. The Greatest Prayer: Rediscovering the Revolutionary Message of the Lord’s Prayer. 1st ed, HarperOne, 2010. p.89-90

[풀어쓴번역] 끼어들까 아니면 협력할까?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되었다는 그 선포를 현실감있게 알아채기는 어렵다. 그 선포를 맨 처음 들었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얼토당토 않은 선포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곁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어디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단 말인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 (찾아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선포였는데, (하나님을 찾지는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함께 협력해서 하자고 준비하고 기다리신다는 선포였는데, 하나님께서 끼어들어 일을 전부 해결해 주시기만 기다리고 있다.

[마가복음 1:15]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에서 말씀하신 "때"는 카이로스 시간이다. 또한, "찼다"는 동사는 완전히 완료되었다는 뜻의 완료형이다. 그 다음에 "가까이 왔다"는 동사도 도착했다는 뜻으로 쓴 완료형이다.

주기도문을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다가 크로산의 주기도문 해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오클랜드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협력을 기다리신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말이 어눌한 모세를 부르고 기다리고 설득하시는 출애굽의 하나님이 생각났습니다. 

오랜 설득 끝에 모세를 부르시고, 그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을 완성하셨던 구약의 이야기가 진한 감동으로 아침을 깨웁니다. 오늘 지금 내 몫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벌떡 일어나야겠습니다. 

Sunday 17 July 2022

주일설교: 사랑으로 만나는 마르다와 마리아



말씀 : 누가복음 10:38-42
주제 : 사랑으로 만나는 마르다와 마리아


차례

1. 마르다의 섬김
2. 마리아의 단순한 마음
3. 간단한 감리교회 소개
4. 마르다와 마리아가 함께 있는 교회

오늘 말씀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입니다. 함께 사는 두 자매입습니다. 눈에 사랑이라는 콩깎지를 붙이고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면, 그들이 어떻게 보일까요? 마르다를 먼저 소개합니다.


[[1. 마르다의 섬김]]

마르다 때문에, 오늘 말씀이 시작됩니다. 마르다는 말씀의 시작과 중간과 끝에 모두 등장합니다. 마르다가 주인공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 마르다의 만남, 그 만남이 오늘 말씀의 시작입니다.

만남을 “초대”로 이어가는 것이 마르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성경에는 “모셔 들였다” 하고 기록합니다. 마르다는, 식사 준비를 시작합니다. 간단한 식사가 아니었던가 봅니다.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합니다. 일이 많은 것을 예수께서도 알고 이야기합니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있다” 하셨지요.

마르다의 초대가 “너무 많은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르다가 잘못한 것일까요?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마르다가 지금 하는 “많은 일”이 무엇일까? 그래서 살펴 보다가, 뜻밖의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마르다가 벌려 놓은 “많은 일”의 정체를 알고 보니,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성경 그리스어로는 “디아코니아”입니다.

“섬기는 일”, 다시 말해, “디아코니아”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복음 10:45) 하고 말씀하실 때에, “섬김”은 예수님의 일입니다. 성만찬 식탁에서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누가복음 22:27)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섬김”은 예수님의 일입니다. 여기에서 “섬김”은 “식탁에서 (웨이터로서) 시중든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섬김”은 예수님의 일이면서, 동시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섬김”은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되었습니다. 마르다가 열심히 하는 “많은 일”이 바로 “섬김”이었습니다.


[[2. 마리아의 단순한 마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마르다”를 편들어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만난 것도 마르다였고, 그들을 집으로 초대한 것도 마르다였고, 그들을 대접하는 것도 마르다였습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부터 끝까지, 마르다는 혼자서 이 모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성경을 다시 읽어보면,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도 마르다였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도 마르다였고, 마르다에게 대답하는 예수님의 대답이 향한 것도 마르다입니다. 마르다는 당연히 오늘 말씀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마르다”를 편들어 주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마리에에게서 찿을 수 있읍니다. 자매 마리아를 좀더 살펴봅시다. 마리아는 오늘 말씀에 잠깐 등장합니다. 엑스트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한마디 대사도 없는 엑스트라입니다. 그리고, 겨마리아는 일하지 않습니다. 꼼짝도 않고 앉아만 있는 역할입니다. 마리아는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마리아는 듣기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듣기만 하는 마리아”를 편들어 주십니다. 엑스트라 인생, 마리아를 편들어 주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0:42) 하며 격려합니다.

마리아를 격려하는 이유도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주님의 일은 하나뿐”이라는 이유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간단합니다.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의 섬김은 중요하지만, 마리아를 지켜주고 구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감리교회는 “하나뿐”이라는 말씀을 “사랑”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감리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3. 간단한 감리교회 소개]]

잠깐, 감리교회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감리교회 사람들을, “오직 한 책의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것도, 이 말씀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은 하나뿐”이라는, 이 말씀에 기초해서,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 말씀 때문에 함께 모였습니다. 성경 때문에 모이는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때문에 작동하는 믿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사는 삶을 “거룩한 삶”이라고 부르며, 매일 매 시간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기도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뿐이라는 단순함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매일매일 실천하였습니다. 한 책의 사람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이것이 감리교회의 시작부터 전해오는 감리교회의 꿈이고, 특징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이후에 찾아온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태복음 4:4)


[[4. 마르다와 마리아가 함께 있는 교회]]

이제 결론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섬김”을 기꺼이 받으셨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초대에 응하셨고, 마르다의 분주함도 그저 지켜 보셨습니다. “마르다의 섬김”은 예수님의 일이기도 하였고, 특별히 강조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바로 그 “섬김”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인 우리가 반드시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의무인 “섬김”을 마르다가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아무 일도 안하고 듣기만 하는 마리아를 칭찬하셨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주님의 일은 하나뿐”이라며, 많은 일로 염려하는 마르다를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앉아서 말씀만 듣는 마리아를 칭찬하며 지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꾸지람이 마르다에게도 위로가 되고, 동시에 우리에게도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섬김”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듣기만 하는 마리아 때문에 마르다는 “주님의 일은 하나뿐”이라는 지혜를 얻게 되었고, 감리교회 또한 그런 마리아의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마르다도 있고 마리아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분주하고 바쁜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들어야 할 것도 많고, 봐야 할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고, 가져야 할 것도 많은 시대이지만, 그러지 맙시다. 들어야 할 것, 봐야 할 것, 배워야 할 것, 가져야 할 것이 하나뿐인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마리아가 선택한 단순함을 지켜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지금 우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표되는 아픈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순수한 사랑으로 섬기는 마르다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마르다의 섬김으로 마리아를 지켜주는 교회, 섬기는 사랑으로 서로를 구원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투지 말고 서로 배려하고 기도하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함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교회 #주일설교

유튜브에서 설교 듣기: https://youtu.be/VoTbq0iOwo8

Tuesday 12 July 2022

주일설교: 이웃이 왜 궁금해요? - 크리스천의 의무



말씀 : 누가복음 10:25-37
주제 : 이웃이 왜 궁금해요?


차례

1.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
2.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
3. 크리스천의 의무

[[1.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


오늘 말씀은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대화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멋진 주제입니다. 멋진만큼 예수님 이전에도, 벌써 수천 년 동안 인기 만점의 주제였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신명기 6장 5절에서 하나님 말씀을 대표하였고, “이웃 사랑”은 레위기 19장 18절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율법교사 뿐만 아니라, 누구나 당연히 잘 알고 있던 말씀입니다.

당연히, 수천 년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수 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는 간단했고, 분명했습니다. 아무 문제 없는, 멋진 주제였습니다. 간단하지만 어려울 수도 있는 질문에, 예수님은 재치있게 누구나 알고 있는 핵심을 끌어내면서, 그 핵심을 그대도 행하면 살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2.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


아무 문제없이 대화가 진행되자, 율법교사가 제대로 열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를 시험에 빠뜨리고 싶어서 질문했는데, 예수께서 잘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 우리도 율법교사의 질문에 나름대로 대답해 봅시다.

첫째, 두 개의 물컵

첫째, 저는 두 개의 물컵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물은 절반만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절반, 그리고 채우지 않은 나머지 절반은 우리의 몫입니다. 실천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컵을 받아 들고, 고민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는 신명기 6장 5절의 “하나님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을 대표하는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 찬양, 기도, 성경, 묵상을 통해 간절하게 노력합니다. 이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 활동, 봉사, 자선, SNS, 카톡으로 간절하게 소통합니다. 문제는, 한 개의 컵만 마실 수 없다는 규칙입니다. 두 개의 컵으로 마셔야 한다는 규칙을 예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마리아”라는 이름

둘째, “사마리아”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마리아”는 차별의 언어입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과의 대화에서, 여인은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대놓고 차별하였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화가 나서 했던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도 사마리아를 ‘하찮은 존재’, ‘차라리 없으면 좋은 나쁜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안된다고,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강도만난 사람을 치료하고 숙소로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다고 합니다. 다음 날, 그는 추가로 들어갈 비용으로 두 데나리온(최저임금으로 계산하면 적어도 $336)을 여관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이웃이 누구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가장 못된 사람을 이웃으로 소개합니다. 그 못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인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당혹스러운 도전입니다.

[[3. 크리스천의 의무]]


우리 앞에는 두 개의 물컵이 놓여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의무는 반드시 두 개의 물컵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차별의 언어를 지우는 데서 시작합니다. 가장 못된 마음을 “이웃 사랑”으로 바꾸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웃을 왜 궁금해야 합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듯이, 우리 곁에 이웃을 알아가고 많이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삶을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복된 소식, 복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제자들교회 #주일설교

유튜브에서 설교 듣기 : https://youtu.be/xMCl9b1Jn1g
함께 읽을 수 있는 블로그 : 이웃과 분쟁 해결을 노력

Monday 4 July 2022

주일 설교 : 둘씩 둘씩 -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 이야기

본문 : 누가복음 10:1-11, 16-20
주제 : 둘씩 둘씩


차례

1.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이야기
2.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을 점검하라는 말씀
3. 예수님 곁에서도 방황하는 제자들
4.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이야기]]

혼자서 힘들 때, 오늘 말씀이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둘씩 보냈습니다. “증인되어라” 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서로 힘이 되어 주어라”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외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3:35)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하고, 서로를 위해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는 친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혼자보다는 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전도서 4:9-10)

[[2. (오늘 말씀은)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을 점검하라는 말씀]]

오늘 누가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첫째, “증인되어라”, 둘째, “힘이 되어 주어라” 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셋째로,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잘 살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오늘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서로를 어떻게 돕고 있는지? 서로 지탱해 주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도록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어떤 도전을 주는지, 오늘 말씀에 집중해 봅시다. 오늘 말씀은 (제자 가운데서도) 특별히 부름받은 제자들에게만 주는 파송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선택한 제자들에게만 말씀합니다. 그들이 각각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그들을 특별히 선택한 까닭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해야 할 일이 있고, 둘째, 그 일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추수할 것이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합니다. 할 일은 있는데, 일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사람이 없어서 일까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하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주변 제자들의 상황이었습니다.

첫째는, 능력이 없어서 꺼립니다. 힘이 없어서 하지 못하고, 지쳐서 할 수 없습니다. 핑계 대기도 좋습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약해서 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지혜가 없어서 꺼립니다. 일하는 방법을 모르니, 연습할 엄두를 내지도 못합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면, 더욱 두려움이 앞서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어려워서 꺼립니다.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위험한 일에 나서서, 다칠까봐 아예 못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주변의 상황을 이렇게 묵상해 보면, 나 자신은 무엇 때문에 꺼리는지, 스스로를 점검하게 됩니다. 

[[3. 예수님 곁에서도 방황하는 제자들]]

오늘 말씀의 중심에 있는 예수님의 주변을 돌아 봅시다. 예수님 곁에는 떼를 쓰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제자들이었지요. 지난 주에 읽고 묵상한 말씀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 어디든지 가겠다고 하는 제자들입니다. 그 중에는 12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72명의 제자들을 특별히 따로 선택합니다. “추수할 일꾼”으로 특별히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둘씩 둘씩” 보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 일이 얼마나 어렵기에,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예수께서는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하며, 그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위험한 일인지를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이 일이 무슨 일인지 짐작하실 수 있으신지요?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거창하게 야단법석일까요?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는 일입니다. 간단한 인사이지만, 그 안에 담긴 “평화”는 훈련된 제자들에게도 많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산상수훈 팔복에 관한 가르침을 기억하시면, “평화”를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팔복 말씀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하셨지요. 그리고 곧바로 이어나오는 구절, “너희가 나 때문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팔복 말씀에서, “나 때문에”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는 더욱 당황하게 맙니다. 예수님의 평화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말을 예로 들어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로 훈련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어디든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 야고보와 요한도, 울컥하는 마음에, 평화보다는 전쟁을 선택하려고 예수님을 졸랐던 지난 주일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상은 그렇게, 평화를 선택하기보다는 전쟁을 선택하는 세상풍조였습니다.

그러니,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은 적다” 하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하는 나라입니다. “둘씩 둘씩” 기도를 모으고, 지혜를 모으고, 서로 격려하며,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주기도문”을 기도하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예수께서, 여러분을 부르고 저를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함께 하자고, 부르십니다. 서로 격려하며 일하자고 부르십니다. 할 말을 주시는 성령께서 힘이 되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세상을 이길 권세를 주셨으니 염려말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러분의 힘이 되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기고, 평화를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제자들교회 #주일설교

유튜브에서 설교듣기 https://youtu.be/CtH952AOz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