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27 June 2022

주일 설교 : 예수 따름


본문 : 누가 9:51-62 주님을 따름
주제 : 열매 맺는 예수 따름(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차례
1. 이웃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2. 예수를 따라 사는가
3. 제자들의 실패
4. 저마다 예수를 따르고 싶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좋은 열매가 맺히겠지요.

[[이웃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웃 교회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이웃 교회가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첫째, 만난 장소가 교회이니, 교회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햇빛으로 자연채광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옛 전통과 신학을 따라 8각형 모양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콘크리트 블럭으로 쌓아 올린 까닭은 유지 보수를 쉽게 하려고 배려한 것이랍니다.

둘째, 교회 역사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8각형 교회는 건축가 에릭 로빈슨이 설계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1823년에 카에오 지역에 도착한 선교사가 나티우루 마오리 부족에게 쫓겨나서 숲속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200년이 지난 지금 밝혀진 이야기가 있답니다. 그 때 나티우루 부족은 선교사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해가 겹쳐서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온난화와 코비드19로 바뀌는 환경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바뀐(meta) 교회, 대형(mega) 교회, 새로운 가치, 전통, 음악, 지역사회; 여러 가지 주제가 꼬리를 물고 툭툭 튀어 나왔습니다.

[[예수를 따라 사는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한 가지 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를 들어, 창문을 통해 비춰 들어오는 햇빛 이야기를 한 것도, 어떻게 얼마만큼 햇빛이 들어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고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목사들이 모이면, 할 이야기가 그렇게 뻔한가 봅니다.

역사 속에서 슬펐던 일 즐거웠던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한 우리를 돌아보는 이야기였습니다. 청년들 이야기를 하면서는 21세기 청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털어 놓았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모습을 반성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온난화, 코비드, 전쟁을 겪으면서, 온 세계가 새로운 질서(system)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법을 만들고, 마을의 모습을 바꾸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가 "예수 따름"이라는 주제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고민하고 묵상하고 질문하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수천 년 뿌리 깊은 전통과 경험과 유산과 지혜를, 묻어 두거나 버릴 것이 아닙니다. 끄집어 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고, 교회가 역사 속에 증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끄집어 내고 실천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실패]]

오늘 읽은 성경에는, 제자들의 잘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노력은 했지만,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장 열심히 예수님을 따랐던, 야고보와 요한도 잘못합니다. 못된 이웃을 만났을 때, 그랬습니다. 평소에도 관계가 나빴던 이웃이었습니다.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고, 인사도 하고 싶지 않았던 이웃,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못되게 구는 모습을 보고는, 화가 더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아주 끝장을 내자고,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반대했습니다. 못된 이웃, 사마리아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하듯이 사랑하여라" 하고 가르쳤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그렇게 못된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못된 이웃에게서 착한 모습을 찾아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얼굴도 보고 싶어하지 않던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 일부러 사마리아 사람들의 동네로 찾아가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결국은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피해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하는 말씀이, 피해서 갔다는 뜻입니다.

저마다 예수를 따르고 싶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저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어떤 이는,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끝내고 와서 따르겠습니다." 합니다. 또 다른 이는,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합니다.

저마다 자기 형편이 다릅니다. 하지만, 따르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이들이 모두 예수님을 따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쯤은 분명히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으면, 열심히 사랑하자는 것 하나는 알겠습니다. 실수하고 잘못해도, 예수님께서는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잘못했던 야고보와 요한도 꾸짖어서 바로 세우고 진짜 제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한 가지는 기억합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이같은 성령의 열매를 날마다 풍성하게 맺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맺은 열매를 헤아려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홉 가지 열매를 하나씩 헤아리다보면, 그것이 사랑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교회 #주일설교

- 유튜브에서 듣기 https://youtu.be/L4LgsUzgKbw
- 함께 읽을 수 있는 글 지역 목사와 만남; 로빈 목사님

Sunday 19 June 2022

주일설교 : 자신을 찾은 사람

 
본문 : 누가복음 8장 26-39절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많이 아픈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주인공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주인공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는 갈릴리 호숫가 마을에 삽니다. 착한 마을입니다. 그 한 사람의 아픔을, 온 마을이 함께 걱정합니다. 자기 일처럼 생각합니다. 위험한 곳으로 뛰쳐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줍니다. 지켜 줍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고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사람이 얼마나 아픈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2천 년 전 그 마을로 시간여행을 떠나봅시다. 그 마을은 갈릴리 호숫가이면서, "데가볼리"라는 로마 제국의 점령지였습니다. 로마는 강력한 군대를 보내서 힘으로 통치하였고, 군대를 먹이고 입히고 무장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세금이 필요했습니다. 주둔지의 세금은 마을을 위해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로마를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데가볼리 지역에는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레기온 10 군단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만큼, 가장 많은 세금을 거둘 필요가 있었겠지요. 1년 동안 곡물 포도주 야채 고기만 1500~2000t이 필요했습니다. 5톤 트럭 400대 정도의 분량입니다. 400대를 일렬로 세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그 양은 어마어마합니다. 

그 결과로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굶주렸고 영양실조로 고통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지만, 로마는 죽은 사람들에게서도 세금을 받았습니다. 거리에는 부자집 대문 앞에서 굶어 죽었던 나사로와 같은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세금을 낼 수 없어 도망가면, 가족이 대신 그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점령지역 사람들의 인권은 가벼웠습니다. 

로마 군대를 위해서 길을 만들고 물건을 나르는 일에도 마을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if one of the occupation troops forces you to carry his pack one mile, carry it two miles.)" 하신 말씀도, 아무 때나 강제할 수 있는 징집명령이었습니다.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로마 군대의 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로마법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불법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서 저항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오늘 읽은 성경에 집중해 봅시다.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신에게 붙잡혀서 (1) 옷도 입지 못하고, (2) 집에서 살 수도 없고, (3) 무덤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귀신만 아니라, 로마 시대의 군대와 잘못된 정치가 그를 더 아프게 했을 겁니다. 

크리스천이 성경 읽는 방법은 특별합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돌아보는 방법입니다. 성경에서 아픈 사람을 만나면, 우리의 몸은 아프지 않은지 돌아보고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건강한지, 또한, 우리 영혼은 건강하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다 건강해서, 행복한지 꼼꼼하게 성경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모습을, 성경에서 만난 아픈 사람의 형편과, 비교해 봅시다. 지난 3년 동안 코비드19는 우리의 일상을 멈추어 세웠습니다. 마스크를 쓰게 하였고, 이웃과의 물리적 거리를 강제하였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고, 작은 가게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더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기후 변화와 전쟁 또한 심상치 않습니다. 아프리카는 벌써 식량이 부족해서 굶주리고, 남태평양과 아시아와 나토 연합은 새로운 냉전체계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거센 바람에 에임하이 간판은 넘어지고, 노스코트 도서관 앞의 가장 큰 나무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시대와 우리 시대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좀더 진지하게 돌아 볼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서 만난 로마의 점령지역,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겪는 아픔, 스트레스,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21세기 전쟁과 환경 문제를 겪고 있는 우리 지구의 아픔,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과 꼭 닮은 것은 아닌지? 질문해 봅니다. 

오늘 성경에서 만난 사람을 좀더 자세하게 봅시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큰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큰 소리를 질렀지만, 해야 할 말은 한 마디도 못했습니다. 소리만 컸지 그저 외침이었습니다. 단지, 비명 소리일 뿐입니다. 도와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저 비명 소리와 몸짓으로만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자기 의사인지, 아니면 귀신이 약해진 틈을 타고 비져나온 몸부림인지? 그것도 확실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실제로 말한 것은 귀신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붙잡고 있는 귀신이 말했습니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귀신은 예수님께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첫째,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합니다. 이때 감추어져 있던 것이 밝혀집니다. 한 사람을 붙잡고 있는 귀신이, 하나가 아니라 5,000이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 귀신의 이름이 데가볼리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절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귀신들려서 많이 아픈 사람은 절실했습니다. 5,000 귀신에게 붙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로 뛰어 나왔습니다.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지만, 온 몸으로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자유가 없었던 그에게, 그것만으로 그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첫째, 그가 예수님께로 뛰어 나온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둘째, 치유받은 뒤에 말할 수 있게 되자, 그가 말합니다. "예수님! 함께 있게 해 주십시요" 하고, 애원합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셋째, 더 큰 기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낱낱이 온 마을에 알렸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주변의 환경이 우리를 많이 아프게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는, 거라사에서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지구가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십니다. 

귀신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에게까지도,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순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모든 아픔을 치료받고,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매 시간마다,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자들교회 #주일설교 #누가복음 #누가8:26-39 #거라사

Sunday 12 June 2022

배려와 동행

말씀 : 요한복음 16:12-15
주제 : 삼위일체주일; 배려와 동행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차라리 예수께서 아무 말 안했으면, 나을 뻔 하였습니다. (그랬을까요? 그랬다면, 오늘 설교도 많이 달라졌겠지요. 어쩌면, 오늘 설교는 없었을 수도 있을수도)

제자들은 궁금했습니다. 알고 싶었습니다. “할 말이 많다” 하고, 말이 없으니, 더 궁금했습니다. 자세한 말씀이 없으니, 제자들은 많이 답답했나 봅니다. 궁금증이 생기고, 궁금증은 근심이 되고, 근심이 커졌나 봅니다. 웅성웅성하며, 근심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되어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이 날 제자들의 근심은, 예수님의 배려가 가져온 근심이었습니다.

쓸데 없는 근심

쓸데 없는 근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이 달라서 생긴 근심입니다.

마음에 근심이 생기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은 예수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사랑이고, 그래서 나온 배려라면, 근심으로 응답하기 보다는 사랑과 배려로 응답하는 것이 좋겠지요.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는데, 그 사랑이 근심이 되면, 쓸데 없는 근심이 틀림없습니다. 웅성웅성하며 근심하는 대신에,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첫째, 근심대신 사랑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근심대신 사랑을 배울 수 있을까요? 특별히, 요한복음은, “사랑”을 대놓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신 말씀에서도 “사랑”, “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말씀에서도 “사랑”,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하신 말씀에서도 “사랑”입니다.

“사랑”을 너무 자주 말씀한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 “사랑” “사랑”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사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은 것”도 “사랑”,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하는 배려도 “사랑” 그래서 할 말도 하지 않는 것도 “사랑”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떠남과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도 “사랑”, 돕는 분 -보혜사- 성령의 “오심”을 이야기 하는 것도 “사랑”,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도 “사랑”인 것을 알게 되면, 말씀이 모두 “사랑”인 것을 알게 되면, 그 때부터, “성경 말씀”을 “사랑”이라고 읽게 됩니다.

둘째, 세상을 이기는 사랑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 복음 말씀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지상에서 마지막 고별 설교입니다. 마지막 고별 설교를 듣다가, 제자들이 웅성웅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설교 시간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도대체 지금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 혹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다”(요한복음 16:18) 하며, 묻고 대답하는 것이 자유로왔던가 봅니다. 설교 시간에도 제자들이 웅성웅성하며 묻고 대답하는 장면이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지금 무엇을 가지고 서로 논의하고 있느냐?”(요한복음 16:19)하고 묻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랑과 배려 속에서 계속되는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 설교 결론은,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입니다. 궁금한 단계에서 떠날 때입니다. 근심하는 단계에서 떠날 때입니다. 웅성웅성하는 단계에서 떠날 때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길 때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유혹, 세상의 아픔을 이기고 “사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셋째, 동행하시는 사랑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까닭은 “사랑”이었지요.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감당할 만큼만 이야기하는 “배려”였습니다.

그때 그 시대 제자들은 몰랐지만, 지금 우리들은 압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감당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주는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십자가의 고난, 그 상처와 그 아픔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성령을 간구합니다. (지치지 말고 힘을 낼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호해 주시는 분, 도와주시는 분”,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을 간구합니다. 성령을 간구하는 기도는, (최후의 만찬에서 드리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1)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도, 사랑입니다. (2) 예수께서 사랑으로 보혜사 성령을 간구하시는 것도, 사랑입니다. (3) 성령께서 세상을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시며 변호하시고 도우시는 것도, 이제는 분명합니다. 사랑입니다.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동행하신다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따라, 세상을 이기고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교회 #주일설교

Sunday 5 June 2022

사랑으로

말씀 : 사도행전 2:1-21, 요한복음 14:15-17 
주제 : 성령강림주일; 사랑으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날, 오늘은 교회가 태어난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첫번째 성령강림 주일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의 혀같이, 성령이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하고 기록합니다. “성령 충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성령받은 각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는 소리를, 서로 다른 민족이었지만, 각자 태어난 곳의 방언으로 잘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성령의 불길로 뜨거워지는 기적이 일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전하는 말을 알아듣는 기적이 일어나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충만함으로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열매; 사랑 

성령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아주 특별한 기적이 또 하나 있습니다. 삶이 변화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기적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아홉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열매”는 단수명사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는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열매라는 뜻입니다. 

이쯤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떼를 쓰며 주장해도 맞는 말이 됩니다. 뜨거운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 알 수 있는 열매입니다. 알 수는 있어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렇지만 영원한 “사랑”, 우리 삶 속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그 “사랑”이 기적입니다. 

성령 강림절; 사랑에 빠진 사람들 

이런 성령에 대해 잘 알고 싶을 때는, 요한복음 말씀이 도움이 됩니다. 성령을 약속하는 예수, 성령받기를 기도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 최후의 만찬에서 보혜사 성령을 약속할 때는,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가장 아픈 시간, 동시에, 마지막 이별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오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그 마지막 때의 약속을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하며, 다시 한 번 "사랑"을 강조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온통, “사랑”, 사랑타령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오순절 다락방의 모인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받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 기다림, 실천; 이런 것들은 사랑에 빠진 크리스천에게 나타나는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들의 사랑이 정의와 함께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하는 십자가 사랑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존중하는 사랑이고, 모두가 함께 살아갈 방편을 마련하는 나눔의 사랑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픈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치료하는 돌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누구나에게 공평한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가 이루어지는 온전한 사랑입니다. 

성령받은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조롱, 놀림, 위협, 폭력과 거짓의 세상에 살았으나, 세상의 방법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사랑의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령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절에 맺을 열매; 사랑 

21세기는 코로나19, 전쟁, 온난화, 4차혁명으로 시작된 사회변화가, 온갖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면서, 식량 경제 사회 정치 문화 교육 의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 없는 아픈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회복과 치유의 노래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시편의 노래를 소개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여기에서 시편의 시인은, 폐허만 남은 아픈 현실 속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노래하며, 꿈을 꿉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누구나에게 공평하고 온전한 사랑이, 우리 시대를 가득 채우기를 노래합시다. 

성령받은 사람들이, 사랑을 노래하고 춤추며,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오늘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빠진 여러분의 성령 충만한 삶을 축복합니다. 

#제자들교회 #주일설교 #2022년6월5일 #성령강림주일